바로 곁에, 한수정
해외 수목원 탐방
북극의 지하 정원, 미래를 심다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를 아시나요?
노르웨이의 북극 끝자락, 스발바르 제도의 얼어붙은 대지 아래, 하나의 정원이 ‘잠들어’ 있다. 이곳엔 꽃도 없고, 나무도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여긴, 인류가 가장 간절하게 지키고자 한 정원이다. 바로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Svalbard Global Seed Vault), 일명 ‘지구의 마지막 씨앗 창고’다.
전 세계적에서 단 두 곳뿐인 시드볼트
시드볼트는 시드(Seed, 종자)와 볼트(Vault, 금고)가 합쳐진 단어로, 종자를 보관하는 금고라는 의미다. 종자를 저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종자은행(Seed Bank)과 비슷하지만 지구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여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종자은행은 연구나 증식을 위해 중·단기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지만 시드볼트는 기후변화나 전쟁, 핵폭발 등 예상치 못한 지구 차원의 대재앙에 대비하여 야생식물의 멸종을 막는 초인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자의 보관 기간은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종자은행은 여러 나라에서 많이 갖고 있지만 시드볼트는 전 세계에 단 두 곳뿐이다. 한 곳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Baekdudaegan Global Seed Vault, BGSV)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북유럽유전자원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노르웨이 북쪽 섬 영구동토층에 위치한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Svalbard Global Seed Vault, SGSV)이다. 이곳에는 전 세계 약 110만 종의 작물 종자가 저장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의 작물 종자도 보관되어 있다.
씨앗, 생명의 백업 파일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는 2008년에 문을 열었다. 시드볼트의 종자 반출은 매우 엄격하고 제한적인 조건에서 이뤄진다. 핵전쟁과 같은 대재앙이나 특정 야생 식물 종이 자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경우 혹은 생태계 복원을 위해 긴급히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시드볼트에 한 번 입고된 종자는 원칙적으로 영구 보존된다. 이러한 이유로 시드볼트는 종종 ‘지구 최후의 날을 위한 금고’라 불린다. 실제로 스발바르 시드볼트에서 전쟁으로 인해 기탁국이 씨앗을 되찾아간 사례는 단 두 번뿐이다. 2011년 시리아에 본부를 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는 정세 불안을 감지하고 미리 종자의 중복 표본들을 스발바르로 보냈다. 이후 시리아에 전쟁이 터졌고, 2015년 ICARDA는 스발바르에 도움을 요청해 그동안 맡겨둔 종자 일부를 돌려받아 레바논과 모로코에 유전자은행을 다시 만들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지 유전자원은행 일부가 파괴되면서 손실자원을 대체하기 위한 씨앗 반출이 있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정적인 정원
시드볼트가 북극 한가운데,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에 세워진 이유는 명확하다. 영구동토층이라는 자연 냉동 시스템, 정치적 안정성과 지질학적 안전성, 외부 위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거리. 즉,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의 힘을 이용해 오래도록 ‘보존’ 가능한 공간이라는 뜻이다. “씨앗을 심지 않고 지킨다는 것. 꽃을 피우지 않지만, 언젠가의 피어남을 위해 묻는다는 것.”
오늘날, 식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멸종되고 있다. 기후위기와 서식지 파괴, 전쟁, 산업화는 수많은 식물 종이 씨앗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씨앗을 지키는 일은 곧 ‘생명권’을 지키는 일이 되었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백두대간, 그 안의 노아의 방주
2019년 6월, 경북 봉화에 위치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노르웨이 농식품부와 ‘종자 기탁 협약’을 맺었다. 국내 작물 종자를 ‘인류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리는 스발바르 시드볼트에 보존하기 위한 협력이다. 이후 2020년 2월, 백두대간에 자생하는 희귀·약용 식물 10종의 종자가 노르웨이 북극 지하 저장소로 옮겨졌다. 그중에는 국가표준식물목록 기준 희귀식물인 두메부추, 한방약재로 사용되는 오갈피나무, 향토 허브로 알려진 배초향(방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2050년까지 전 세계에 분포하는 야생식물 종 수의 30% 저장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와의 협력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5월 30일을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의 날’로 지정했다. ‘2050’의 5와 ‘30%’의 30을 조합한 날짜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약속을 상징한다. 매년 이날에는 씨앗과 생명 보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언젠가 피어나야 할 내일을 위해,
백두대간 깊은 땅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정원이 숨 쉬고 있다.









